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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롤롬보이에서의 생활

2017.11.15 14:51

윤태일 조회 수:223

롤롬보이에서의 생활


롤롬보이 지역은 마닐라 만의 북서쪽에 위치한 저지대로 강과 바다 가 만나는 지역이며 내륙 깊숙이까지 물길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배로 내륙 깊숙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김대건 일행이 이곳에 도착할 때도 육로가 아닌 배로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농장 안에 선착장이 있어 직접 도달이 가능했다. 특히 이 지역은 지대가 낮고 연못이 많아서 전통적으로 양어장이 많고 물고기 양식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김대건 일행이 묵었던 도미니코회 농장도 커다란 연못을 가지고 있고 이 물길 은 강으로 연결되어 바다에 이르렀다.

 

평온한 생활 분위기


이곳에서의 생활은 목가적 분위기에서 주로 학업에 힘쓰며 저녁 무렵에는 호수 주위를 산책하며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겨 찾았던 것 같다. 그곳에서는 마카오에서 온 김대건 일행만 있어서 생활환경이 마닐라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누구에게 방해를 받을 필요도 방해를 할 필요도 없었다. 원하는 대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데플레슈 신부가 매일 조선 학생들에게 수업을 시켰으며, 그 밖의 시간에 선교사들은 중국말이나 포르투갈 말과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모두가 잘 지내고 있는 편이나 김대건만은 좀 예외다. 그는 자주 복통과 두통과 요통을 앓았다. 그는 마카오에서 칠면조 집의 대들보들을 들어 준 후부터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김대건에게 마카오에서 왜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랐더니 칼르리 교장 신부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데 칼르리 신부는 그것이 발육 과정에 서 오는 증상이라고 말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도미니코회 투아네트 신부의 처방대로 약을 지어 주게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식사도 잘하고 잠도 잘 자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 건물 안에는 소성당이 있어서 미사를 드리러 본당까지 가지 않아도 되어 편리했다. 그들은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아서 그 지방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이 지역에는 대나무가 많이 재배되는 지역이라 이 대나무를 보며 고향 에서의 대나무 이야기를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 장면이 편지에 나온다.

아마 조선의 소년들은 고향인 조선의 대나무가 여기 있는 대나무보다 아름답다는 자랑을 선교사들에게 이야기한 것 같다.

 

폭넓은 교류


필리핀에서는 도미니코 수도회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와 프란치스코회와 아울러 마닐라교구 주교와 스페인 총독 등 모든 사람 들이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마카오에서 다소 고립되어 생활하던 것에 비해 모든 것이 여유로워졌으며 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폭넓은 교류 관계를 이루었고 이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여유를 가져다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시야 확대

마젤란에 의한 세계 일주로 인해 바야흐로 전 지구의 정체는 명확해 졌고 세계는 하나의 경제권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필리핀의 마닐라는 16세기부터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중국과 스페인을 이어 주는 무역의 중심지다. 따라서 소서양이라 불릴 만큼 서구화되어 있었다. 중국의 비단과 차 그리고 도자기를 실은 화물선이 수시로 마닐라와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오가며 상품과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마닐라 앞 바다는 언제나 세계 도처로 향하는 선박들로 붐볐다. 또한 교황청은 마닐라에다 교황청 직속 대학인 산토 토마스 대학을 세워 가톨릭과 신학문 보급에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 등은 당시 조선에서는 상상 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적 충실 기간


소년들 중 평소 잔병치레가 많았던 김대건이 롤롬보이에서의 생활 이후에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편지 속에서 여러 번 보이 고, 더욱이 이후의 선교사들이나 김대건 자신의 편지의 내용에서 잔병 치레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김대건은 롤롬보이 생활 중에 육체적으로 많이 건강해졌다는 것을 짐 작할 수 있다. 아울러 이제까지 김대건은 몸이 허약하고 잔병이 많아

항상 생활 속에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는데 그 이후의 그의 모습은 굉장히 활기차고 적극적이며 자신감에 넘침을 볼 수 있다. 사실 조선을 떠나온 이후의 거의 모든 시간들은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양에서 마카오까지의 살인적인 도보 행군에다, 마카오에서의 생활은 결코 평온하다 할 수 없었다. 아편전쟁 전야의 긴장감에다가 마카오 당국의 파리외방전교회에 대한 억압 등은 평온과 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찾아온 마닐라는 우선 넓은 데다 나라 전체가 가톨릭화되어 있는 안정된 분위기고 거기에다 도미니코 수도원 수사들의 친절까지 더해지니 마음의 안정과 육체적 건강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도미니코회의 친절


리부아 신부는 르그레주아 대표 신부의 지시에 따라 도미니코회의 총대리와 원장 신부에게 생활비 조로 실비를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그 들은 무엇이든 받는 것을 절대로 거절했다. 선교사들은 실비 지불을 고집했지만 도미니코회 수도원 측은 그들의 체류가 설혹 2~3년이 걸릴 지라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다. 도미니코회 신부들은 롤롬보이에서 김대건 일행을 그들의 가족처럼 대해 주고 있었다. 리부아 신부는 수차례에 걸쳐 도미니코회 관구장에게 체류 비용을 지불하 겠다고 간청하다. 그러나 관구장 신부는 누구나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서로 도와야 할 것이기 때문에 봉사는 당연한 것이니 체류비를 지불하겠다는 고집을 거두어 달라고 했다. 이에 르그레주아 신부는 만 약 도미니코회 신부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 당시 도미니코회에서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내기로 되어 있었던 책값을 받지 않는 것으로 서로 상쇄하도록 지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