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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시대,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갖은 박해에도 신앙 지키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1)하부내포 청양에서 만난 최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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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8 발행 [1602호]
▲ 대전교구 청양 다락골성지 전경. 성지 오른쪽에 2008년 교구 설정 6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기념 성전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소성당과 사제관, 성지사무실 건물이 보인다. 산 능선으로 오르면 37기의 줄무덤이 나온다.


3월 1일로 한국 천주교회 두 번째 사제인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가 탄생한 지 200주년을 맞는다.

‘길 위의 목자’로, ‘땀의 증거자’로 한 생애를 살다간 최양업 신부.

조선 백성들, 특히 박해받는 교우들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의 발걸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거듭되는 박해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롯이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에 의지하며 하느님 백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성사를 주고 덕행을 실천하며 참된 신앙의 모범으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이를 기억하며 탄생 200돌을 맞은 최양업 신부의 삶과 발자취, 성덕, 선교 영성을 그의 탄생지 청양 다락골ㆍ새터 성지와 사목 거점 배티 성지, 묘소가 자리 잡은 배론 성지를 중심으로 돌아보고 네 차례 싣는다.



유학의 시대에 태어난 신앙인

1821년이면, 순조 21년 신사년이다. 당시는 유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던 시대다. 그랬기에 성리학에서 한 점, 한 획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유학자들은 서학(西學), 곧 천주학을 사학(邪學)으로 치부하고 박해했다.

이처럼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유학의 시대에 태어난 최양업은 어떻게 사제가 됐을까?

이를 알려면, 최양업이 자라난 환경과 가족적 배경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1821년 3월 1일생인 최양업은 박해 때문에 내포로 피신한 천주학쟁이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증조부 최한일은 1787년 동생 한기와 함께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에게 교리를 배워 서울에서 세례를 받았고, 조부 최인주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돼 갖은 고초를 겪고 석방된 뒤 모친 경주이씨와 함께 청양 다락골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최인주는 3남 4녀를 낳았고, 그 중 셋째 아들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은 복자 이성례(마리아, 1801∼1840)와 혼인해 장남 최양업을 비롯해 희정(야고보)ㆍ선정(안드레아)ㆍ우정(바실리오)ㆍ신정(델레신포로)ㆍ스테파노 등 여섯 자녀를 얻었다.


▲ 청양 다락골성지 전담 김영직 신부가 오는 3월 1일자로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설치한 생가 표지 돌을 가리키며 새터 생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앙을 선택한 가족

최 신부 탄생 200주년을 보름 남짓 앞두고 눈 내린 청양 다락골을 찾았다. 당시 ‘홍주(현 홍성) 다래골’,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이다. ‘달을 안은 골짜기’ 다락골은 예나 지금이나 궁벽한 골짜기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무명순교자들의 시신도 그래서 다락골 능선에 줄지어 묻혔다. 제1줄무덤에 14기, 2줄무덤에 10기, 3줄무덤에 13기 등 모두 37기다. 그 줄무덤이 자리 잡은 경주최씨 종산 들머리에 다락골성지가 있고, 성지에서 1㎞쯤 앞에 있는 새터에 최 신부 생가터가 자리하고 있다. 최양업은 새터에서 만 6세까지 살았고, 1827년께 최양업 일가는 서울 난동(혹은 낙동, 현 회현동 2가 일대)으로 이주했다가 강원도 김성(현 김화군 김화읍), 경기도 부평(현 인천광역 부평구) 접프리를 거쳐 1838년께 안양 수리산 뒤뜸이(현 안양시 안양3동) 등지로 박해를 피해 다니며 신앙을 지켰다.

“프란치스코 가족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 다니며 자신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자갈밭을 개간해 연명했습니다.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예수님을 위해 자진해 궁핍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성인들의 모범을 철저하게 따르는 길이라고 여겼고, 이를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하며 살았습니다.”(최양업 신부의 8번째 서한)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줄 알고, 예수님 때문에 궁핍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가진 것을 포기하는 집안의 신앙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어졌고, 그 전통은 최양업으로 하여금 ‘아무도 가지 않았던’ 사제의 길을 꿈꾼 밑바탕이 됐다.


▲ 다락골성지 능선에 자리한 제1줄무덤 14기.



땀의 증거자 최양업


최 신부 일가의 신앙을 잉태한 새터 생가는 이제 최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새롭게 단장되고 있다. 지난 1월 최 신부 생가터는 다락골성지 줄무덤(군 향토유적 15호)에 이어 두 번째로 군 향토유적 제39호에 지정됐고, 군은 성지와 함께 3년 프로젝트로 생가 성역화 사업에 들어갔다. 성지에선 특히 지난해 12월 아무런 표식조차 없던 성지 입구에 표지석을 세웠고, 3월 1일 최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생가터 한복판에 표지 돌을 세웠으며, 이에 앞서 2018년 9월에는 생가터 왼쪽에 최 신부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청양군과 다락골성지는 특히 충남 균형발전사업의 하나로 56.19㎡(17평)의 생가터에 1045㎡(316평)의 십자가의 길 14처와 주차장, 농지 9917.36㎡(3000여 평) 등을 모두 1필지로 묶어 최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한옥 경당을 건립하고 주차장 등을 조성하기로 했으며, 생가 복원도 검토하고 있다.

다락골성지 전담 김영직 신부는 “김대건·최양업 신부님, 두 분의 이름에서 그대로 드러나듯, 김대건 신부님이 피의 순교자가 되셔서 조선 교회를 크게 세웠다면, 최양업 신부님은 땀의 증거자가 되셔서 박해받던 교회를 다시 일으키며 평신도들을 양성했다”면서 “최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부디 기적심사 중인 최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해 다시 전력으로 기도하고 기적을 청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던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부평에 살 때였다. 1836년 2월 6일 첫 번째 신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서울 후동(현 중구 주교동)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모방 신부 집에 도착했고, 그해 12월 3일 동료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떠났다. 서울에서 출발해 평양과 의주, 국경 변문을 거쳐 랴오닝성 선양, 네이멍구 마찌아쯔, 허베이성 시완쯔, 산시성 창즈를 지나 마카오에 이르는 3470㎞(8836리), 162일간의 여정은 험난했다.

그렇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한 지 5개월 만에 최방제가 열병으로 숨졌고, 1839년에는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 최양업과 김대건은 그해 4월부터 11월까지 교수 신부들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 근교 롤롬보이로 피해야 했다. 이즈음 조선에선 기해박해가 일어나 아버지 최경환이 1839년 9월 순교했고, 이듬해 1월에는 어머니 이성례마저 순교했다. 이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최양업은 피란지 롤롬보이에서 아버지에게 그리움을 담은 서한을 보낸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