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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기해박해

2017.09.13 11:03

윤태일 조회 수:112

기해박해


김대건 일행이 마카오로 떠난 이후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주교도 의주 변문을 통해 1837년 말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조선교구 설정(1831) 이후 6년 만의 일이었다. 이리하여 1838년 초, 조선에는 프랑스 선교사 3명이 있게 되었다. 이제 조선 교회는 교황청과의 교류 이래 천주교 국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마침내 교우들의 끊임없는 호소가 포교성을 움직여 그 결단을 내리게 한 셈이다. 이 박해는 183935사학 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정식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원인은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사학으로 여겨지던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서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한 벽파 풍양 조씨가 일으킨 것이라 볼 수 있다. 183411월 순조가 승하하고 순조의 손자인 헌종이 8세로 왕위에 오르자, 순원왕후(안동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는 시파이고 그래서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벽파와는 달리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이들은 헌종 초기에는 천주교에 대해 개의치 않으려 했고, 나이 어린 임금이 성년이 될 때까지 현상을 유지하려 했다. 당시의 정사는 순원왕후의 오라버니 김유근(金逌根)이 보필했다. 김유근은 역관 유진길의 권유로 18395월에 세례를 받은 교우였다.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자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았다. 이지연은 개인적으로 천주교를 적대시할 뿐만 아니라 풍양 조씨의 세도를 등에 업고, 대왕대비가 천주교도를 처형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8393월에 천주교 박멸책을 김 대왕대비에게 올렸다. 대왕대비도 이에 동의하게 됐다. 금위대장의 지위에 앉아 국사를 담당하던 헌종의 외삼촌 조병구도 천주교 박해 법령을 선포했다. 천주교인 김순성의 배신행위로 정찰은 뜻밖의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김순성(또는 김여상)은 교회의 사정을 상세하게 관에 제공했다. 그의 제보로 6월에 유진길이 잡혔고, 정하상, 조신철 등 조선 교회 재건 운동의 요인들이 잇달아 체포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73일 포졸 앞에 자현(自現)했다. 조정은 체포되지 않은 두 신부를 잡아들이도록 지시하고, 713일에는 이들을 잡기 위해 충청도에 오가작통법을 엄격히 적용하라고 훈령을 내렸다. 주교는 교우들의 고난을 그치게 하기 위해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 자현을 권했다. 이리하여 두 신부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자현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모방과 샤스탕 두 신부가 압송되어 오자, 포청은 85일과 7일에 3명의 선교사를 신문했다. 대왕대비는 이들을 주문모 신부의 예를 따라 효수경중(梟首警衆)하라고 명했다. 이에 3명의 프랑스 선교사는 중죄인처럼 극형을 받게 되었다. 이어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도 국청(鞫廳)신문을 받게 되었다. 유진길은, “선교사는 천주교에 불가결하여 조선에 인도했으며 이는 교회에 관련되는 일이며 역적이 아니다.”라고 변론했다. 정하상도, “사람은 만물의 조물주인 천주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천주는 모든 민족의 기원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한 백서가 주장한 외구(外寇)를 불러 본국을 해치는 일 같은 것은 천주교 법에는 없는 것이라 덧붙였다. 그는 체포되기에 앞서 몇몇 교우와 함께 호교문을 만들어 당시의 재상 이지연에게 제출한 바 있는데 이것이 신유년 박해 때 만들어진 상재상서(上宰相書)이다. 정부는 정하상과 유진길을 역적으로 몰아 결국 참형(斬刑)을 선고했다. 신앙을 끝까지 지킨 조신철도 사서(邪書)를 강습해 인심을 미혹했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선고 받았다. 기해년 814일 새남터에서 선교사 3인의 효수형이 거행되고 이튿날 서소문 형장에서 유진길, 정하상이 참형되고, 4일 후에 같은 곳에서 조신철을 위시해 9명이 처형되었다. 유진길의 아들 13세의 대철도 이때 순교했다. 기해박해는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 옥중이나 장하(杖下), 또는 병들어 죽은 자가 60여 명이나 되었다. 기해일기는 범 주교의 부탁으로 전교회장 현석문이 거지 행세를 하며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의 총론에 의하면 110명이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본론에는 78(여성 순교자 50, 남성 순교자 28)의 행적이 실려 있다.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192575일 기해일기에 실린 순교자들과 김대건 등이 순교한 1846년의 순교자 중에서 79명을 뽑아 복자 위에 올렸다(諡福式). 기해박해 6년 뒤인 1845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고 주교가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을 동반하고 입국하게 되자 조선에는 다시 성직자의 활동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