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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최방제의 허무한 죽음-6

2016.11.02 19:13

윤태일 조회 수:2490

무려 7개월을 걸어서 그것도 한겨울에 최고 추운 만주 지방을 휴식도 없이 강행군했고 걷는 가운데 봄이 지나고 여름에 도착한 지역은 아열대 지역의 마카오. 급격하게 변한 기후에다가 한겨울 움츠렸던 몸으로 혹한의 지역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날씨는 계속 더워지고 피로는 쌓이고 게다가 해안에 접한 항구 도시 마카오의 날씨는 사계절이 뚜렷한 조선의 날씨와는 너무나 차이가 많아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동행해 왔던 최방제가 위열병으로 사망했다. 선교사들은 편지에서 최방제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충청도의 홍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양반이고 또 지낸 벼슬로 인해 유명했으나 천주교에 입교함으로써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맹수들이 서식하는 높은 산들을 넘어 영원한 구원을 찾아야 했습니다.

거기서 어린 하비에르는 나쁜 표양의 소문은커녕 성령의 감도하심을 따라 미구에 기도와 덕행에 대해 완전한 맛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하비에르를 조선의 성직자 양성을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귀중한 존재로 모방 신부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방 신부는 그를 그의 곁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10개월 동안 그의 훌륭한 소질을 확인한 후 그를 다른 두 소년과 함께 성직자 교육을 받도록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우리 동료 신부 중에서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들은 여행 중 피할 수 없는 외인들과의 접촉 때문에, 또 좋은 이야기를 빼놓고는 온갖 언동을 마다하지 않는 타락한 사람들과 배에서 같이 지내야 하는 오랜 체류 때문에 교우들의 신앙과 품행이 얼마나 위험에 처하게 되는가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용감한 소년들은 8개월 동안 요동과 만주와 중국을 걸어서 횡단한 끝에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그의 본분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주위 사람들을 감탄시켜 마지않을 정도로 열심했습니다. 나의 수업을 받는 동안 그는 늘 완전한 순종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효심은 모든 불편과 속박을 초월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라틴어 공부에서 보인 진전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식사 동안 그는 성경을 알아듣게 낭독했습니다. 이렇게 벌써 우리가 그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게 되었을 때 지난달 중순경에 위열병에 걸렸습니다. 그 발작이 처음에는 약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나 갑자기 그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기력의 쇠약과 극도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병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흔히 있는 것처럼 임종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서 마지막 성사를 받지 못하지나 않을까 그것만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위험이 다가오자 교회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예절이 끝난 후 그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비에르는 나의 손을 잡고 ‘그라 시아스 파트리(Gratias Patri, 신부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의 고상을 입에 갖다 대고 ‘착한 예수! 착한 천주!’를 열심히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나 병세의 악화로 불안해진 우리는 그를 살려 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조선 땅의 이 첫 결실은 하늘나라를 위해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11월 26일에서 27일 밤중에 그의 병상 곁에서 바친 야과와 조과가 끝나자 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숨결이 점점 곤란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즉시 다른 두 학생과 함께 임종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마지막 사죄경을 염해 주고 전대사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어 우리의 성스러운 젊은이는 그의 하느님 곁으로 가기 위해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