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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천주교 박해는 처음에는 양반들을 주로 정치적 숙청 대상으로 올려 제거했고 이어 신도들 전체에 대한 박해로 퍼져 나갔다. 황사영 백서가 적발되면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의 잔당까지 소탕되게 되는데 이후 조정에서는 척사법을 발표해 오가작통법을 발효했다.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어 연대책임을 물리는 것이다. 결국 나 하나 때문에 이웃 전체가 피해를 보는 것을 우려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산속으로 들어가 옹기를 구우며 살게 되며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나중에는 공소를 이루어 공소 회장을 뽑고 교우촌을 운영해 함께 기도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옹기 속에 교리서를 담아 가지고 다니며 믿음을 선교했다. 이런 어려 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숫자는 늘어 갔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식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선교지에서 방인 사제를 배출해 선교 자원을 현지화시키는 방식이라 모방 신부도 조선에 입국한 이후 무엇보다 먼저 조선인 신부를 배출하려는 목적에서 신자 자녀 중 적임자를 물색해 신학 공부를 시키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선발된 학생들이 최양업과 최방제 그리고 김대건, 이 세 명의 소년이었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忠南唐津郡牛江面松山理)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金濟俊)과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양반 집안이었으나 천주교로 말미암아 전락했다. 그러나 모범적 신앙생활과 순교자들을 배출함으로써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 이 집안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한국 천주교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후 그는 1791년의 박해 때부터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했고, 1801년에는 유배되었으며 1805년 해미(海美)에서 다시 잡혀 10년 동안의 감옥살이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했다.

 

끊임없는 박해로 말미암아 자연 이 집안은 많은 가족이 한데 모여 살기가 어렵게 된 것 같고 그래서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金宗漢)은 어느새 솔뫼 고향을 버리고 안동(安東)으로 피신해 살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잡혀 대구(大邱) 감영으로 이송되어 거기서 이듬해 참수(斬首) 순교했다. 그 후 김진후의 둘째 아들, 즉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金澤鉉)도 박해 때문에 솔뫼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때가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였던 것 같다. 김택현은 서울의 청파(靑坡)를 거쳐 용인(龍仁) 땅 골배마실[寒德洞]에 정착했다. 그때 김대건의 나이 7살이었는데, 그는 여기서 그의 나이와 신분에 적합한 한문 공부를 했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1836년 초에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곧 서울의 정하상(丁夏祥) 집에 거처하던 모방 신부를 방문하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서울에서 부활절(4. 5.)을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공소 순방에 나섰는데, 먼저 용인 지방의 골배마실에 이웃 한 ‘은이’ 공소에 들러 아주 열심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 김대건을 보고 총명한 그를 대견스럽게 여겨 신학생으로 간택했다.

 

최양업(崔良業, 1821. 3. 1.~1861. 6. 15.)은 제2대 천주교 사제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세례명은 토마스, 본명은 최정구(崔鼎九)이다.

충청남도 청양군 출생인 최양업은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를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모두 여의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인 최한일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오랫동안 한곳에 정착할 수 없었으며, 자주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최양업의 집은 당시 경기도 과천군 수리산 자락에 자리 잡게 되었다.

 

1836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모방 신부의 천거로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해 신학을 공부했다. 1838년 11월 친구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숨을 거두자, 김대건과 최양업은 신학 공부에 더욱 몰두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부제품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만주와 내몽골 일대를 떠돌았다. 1845년 친구이자 그해 중국 상해 금가항 교회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의 입국은 성공했으나, 최양업은 1846년 1월에 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그는 동년 12월에 재차 입국하려고 시도했으나,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홍콩으로 돌아가 조선의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의 일기를 편집해 기해일기라는 책을 저술하고 이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1847년과 1849년 다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849년 청나라 천주교 강남교구장인 마레스카(François Maresca) 주교에게 조선인으로서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다. 최양업 신부는 이후 랴오닝(遼寧) 성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천주교 조선 대목구장인 장조제프 페레올(Jean-Joseph Ferréol)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나고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한 최 신부는 6개월 동안 삼남 지방 5천 리를 돌면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 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렸다. 그 이후에도 매년 129개의 공소를 돌며 많은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고,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리는 사목을 자그마치 11년 6개월간 지속했다. 1861년 6월 15일 영남 지방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에 과로와 식중독으로 40세의 나이에 문경에서 병사했다.

 

최방제(崔方濟, ?~1861). 세례명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聖人) 최경환(崔京煥)의 조카이며, 최양업 신부의 사촌이다.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1836년 출국해서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經理部)에 도착했다. 그러나 먼 여행 때문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 져 웅지(雄志)를 펴 볼 사이도 없이 마카오 도착 5개월 만인 1837년 11월 26일 밤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