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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한국 천주교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김대건 신부이다. 그는 충청도 천주교 구교우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일찍이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 의해 마카오로 보내져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 후 귀국해 조선 교회를 위한 사목에 노력했으나 채 1년도 되지 않아 조정에 발각되어 아주 젊은 나이에 천주교를 증언하기 위해 순교한 순교자이고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사람으로 일반적으로 기억된다.

 

이에 비해 김대건 신부가 조선 최초로 서양의 신식 학문인 서양 철학, 역사, 신학 및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고, 특히 신학 공부를 하던 기간인 22세 때 영국과 중국 간의 아편전쟁 결과를 결산하는 강화조약인 남경조약 체결 회의에 참석도 했고 그 강화조약 이후 열린 조약 체결 기념 연회에서 청나라 황제의 장인을 위시한 청나라의 강화 전권 대표들과의 모임에도 참석했으며 또한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과 기품 있는 행동으로 중국의 지방 관리들을 단숨에 굴복시키는 능력과 대담함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15세 어린 나이에 7개월을 걸어서 중국 전역을 돌고 돌아 마카오에 도착해 유학했고 또한 아편 전쟁 피난을 위해서는 스페인 배를 타고 필리핀에서 머물며 공부하기도 했고, 또한 기해박해 조사를 위해 조선을 찾는 프랑스 해군의 통역자로 프랑스 군함에 동승하기도 했으며, 더욱이 선교사 입국의 길을 확보하기 위해 소형목선에 의지해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중국과 조선을 오갔으며 또한 선교사 영입을 위한 북쪽 진출로 개척을 위한 훈춘 통로 원정을 위해서는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만주 벌판을 가로지르는 등의 활약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그의 행적에 대해 앞으로 수차에 걸쳐 서술해 나갈 것이다.

  

한편 청년 김대건이 경험한 삶은 그 당시 조선 사회의 생활과 삶에 비교해 봤을 때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차이가 있었고 또한 적응하기에도 많은 힘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건은 그 모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갔고 끝내는 한국 천주교의 최초의 사제에다 성인 품에 올라 한국 천주교의 주보성인이 되었다. 또한 앞으로는 아시아의 주보성인에 이를 그의 치열한 삶을 묘사할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김대건 신부의 26년 생애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가 그와 동갑 나이에 해당하는 오늘의 방황하는 26세 청년들에게 그들의 어려운 현실 극복을 위한 도전에 조금이나마 희망을 보여 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날 우리청년들의 문제인 실업문제와 소통 부재의 해결은 우리 모두의 최대 숙제이며, 이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지 못하면 이것은 26세 청년세대의 불행이 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점에서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함께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통해 서로가 이해와 관심을 기울이고, 26세 세대가 자기들의 위치를 향해 무난히 이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는 영감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이 기회에 천주교가 극동 지역, 특히 조선에까지 도달한 과정들도 자세히 알아볼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의 세계 선교 자체가 동서 교류의 기본 축이었으며 이는 또한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과 마젤란의 세계 일주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전체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고 이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역사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천주교 전래에 대해 국사 책을 통해 중국에 도착한 서양 선교사들을 접촉한 조선의 중국 사신단을 통해 들어왔고 전래 이후는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하는 사악한 종교로 탄압받았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세계로의 창구가 중국만인 상황으로 이해했던 기존의 조선 역사를 이제 김대건을 통해 세계 속의 조선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