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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불안정한 마카오 생활

2017.09.13 10:51

윤태일 조회 수:659

불안정한 마카오 생활


마카오는 광둥 시 남서쪽 120킬로미터 지점으로 광둥 만의 한 반도에 자리하고 있다.

15세기 말~16세기 초 대항해시대는 명나라를 서서히 세계 무역의 조류 속으로 밀어 넣었다. 1524년 포르투갈은 명의 동남 해안에서 밀무역을 시작했는데 이들은 1524년 마카오에 거주 촌락을 형성하고 무역기지로 만들어 나갔다. 이때부터 마카오는 동양과 서양을 소통시키고 경제 관계를 형성하는 항구이자 중계지가 되었다. 마카오-시암-말라카-고아-리스본, 마카오-나카사키, 마카오-마닐라-멕시코 아카풀코, 마카오-동남아시아 항해 노선이 생겼다. 즉 마카오는 중국 시장을 전 지구화 무역의 네트워크 속으로 편입시키고 명 경제를 세계경제의 새로운 구조와 조우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후 등장한 스페인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항로를 연계시켜 가격이 저렴한 중국의 생사와 비단을 멕시코로 실어 날랐다. 1637년 멕시코 한 곳에서만 생사를 원료로 사용하는 직포 공장 노동자의 숫자가 14천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당과 송나라 시대의 실크로드와는 그 성격에서 다른 것이었다. 곧 이 시기는 거대 자본의 원거리 무역과 태평양을 넘나드는 비단과 은의 큰 흐름이 있었던 시대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명과의 무역에서 비단과 자기 등의 생산에서 중국에 필적할 수가 없었으며 어마어마한 수입 수량의 대가를 은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곧 일본, 아메리카, 스페인, 포르투갈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미국 학자 프랑크(Andre Gunder Frank)는 리오리엔트(ReORIENT)에서 17~18세기 세계 은 생산의 3분의 1 이상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고 서술했다. 곧 은은 상품이 아니라 화폐 형태의 자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세계경제 질서에서 중국이 중심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은의 유입은 명나라를 은 본위 국가로 변화시키는 동시에 비단 생산지인 장강(양자강) 삼각주의 경제 곧 농업, 수공업, 상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수공업의 발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소득을 증가시켰다. , 청 시기 강남 지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거대 자본의 시대가 중국으로 향했고 덕분에 중국은 다량의 은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마카오에는 1537년부터 포르투갈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1557년에 정식으로 그들의 거주지가 허락되었다. 그 후 1566년에는 마카오 시가 건립되었으며 1576년에 중국 전체를 관할하는 마카오교구가 포르투갈의 보호권 교구로 설립되었다. 명나라 신종이 1577년 광둥에서 일어난 요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포르투갈인들의 도움을 얻게 되자 이듬해 그들에게 광둥 무역을 허락하고 이 반도를 넘겨주었다. 홍콩이 개항되기까지 마카오는 중국과 세계 사이의 유일한 화물 집산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인도차이나나 중국에 들어가기 위해 이 도시에서 떠났다. 또한 모든 선교회들이 마카오에 대표부를 설치했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이곳에 극동 대표부를 설립한 것은 1732년이었으며 이 대표부는 1847년 초에 홍콩으로 이전할 때까지 여기에 주재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대표부를 마지못해 허락했고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도무지 우호적이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마카오 입국 시 용의주도해야 했고 이 용의주도함은 체류 기간에도 계속되어야 했다. 때로는 그들에게 성직자 복장과 당국 방문이 허용되었으며, 때로는 대표부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마카오에 들어가고 거기에 체류하는 것이 아니라 마카오에서 다시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마카오는 대단히 유리한 요지 중의 하나였다. 유일한 불편은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한 포르투갈인들의 깊은 적대감이었다. 마카오 대표부의 초대 대표인 코냉(Antoine Conain)을 위시해서 프랑스 대표들은 마카오에서 거의 항상 불안하게 살아야 했다. 그들에 대한 핍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이 무너질 위험에 있어서 그것을 수리할 허락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집을 세내거나 새로 사려했으나 그것도 거절당했다. 김대건 일행이 마카오에 도착했을 무렵 마카오의 포르투갈 정부는 외국의 선교사들에게 체류 허가를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체류자들에게도 체류 연장을 불허하거나 체류지를 옮겨 줄 것을 요구하는 등, 그야말로 불안하기만 한 생활이었다. 가뜩 이국의 생활에 적응이 힘든 조선 소년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지는 불안감도 상당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