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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1842년 8월 29일 청나라의 남경(南京)에서는 아편전쟁을 종식하는 역사적 남경조약 조인식이 영국과 청나라 대표 사이에 진행되고 있었다. 근현대사에서 최초의 ‘더러운 전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당사자인 영국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사 기영(耆英), 이리포(伊里布) 가 당시 남경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 콘월리스(Cornwallis)호에서 영국의 전권대사 포틴저(Henry Pottinger)와 조약 내용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하는 한 장면이 있었으니 그것은 한 조선 청년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세실(Jean Baptiste Thomas Médée Cécille) 제독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후일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된 바로 김대건 신학생이었다. 그는 프랑스 함대사령관 세실 제독을 비롯 해 그의 부관 뒤프레(Dupre),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Louis Phillippe) 의 사절인 장시니(D. Jancigny), 지리학자 1명, 20여 명의 선원들과 함께 조인식에 참석해 그 역사적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조인식 후 당시 중국 정부의 조약 체결 당사자들과 면담도 하게 된다.

 

이 아편전쟁은 동서양 역사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전쟁은 동양의 대표 국가인 중국의 청나라와 그 당시 전 세계에 산재한 식민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가진 유럽의 대표 국가인 영국이 맞붙은 세기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커다란 타이틀에 비해 이 전쟁의 결과는 너무나 싱거웠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해서 중국이라고 이름 붙인 천하의 청나라가 나라의 크기로 따지면 비교도 되지 않는 영국에 너무나 싱겁게 패배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전쟁의 결과에 대한 결산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세계 역사에 긴 족적을 남긴 사건이 되었다.

 

중국은 이 전쟁의 패배로 상상을 초월하는 배상금을 부담하는 것은 물론이고 홍콩 할양 등 엄청난 배상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 아편전쟁과 남경조약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는 19세기 조선과 청나라 및 일본, 극동 3국의 운명을 바꿔 놓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 전쟁에 대한 정보를 일본은 일본에 파견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아주 객관적이고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발 빠른 개방 정책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 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에 비해 청나라는 아편전쟁을 변방 지역의 문제 정도로 안이하게 대처하는 통에 바로 연이은 제2차 아편전쟁에 직면했고 이것은 청나라를 서구 세력의 각축장이 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나라는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관보를 통해 이 정보를 접하다 보니 정확한 상황은 애당초 파악할 수가 없었을 뿐 더 심각했던 것은 청나라에 의해 왜곡된 정보를 접하다 보니 이러한 국제 정세에 대한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바로 옆 청나라가 유럽 열강에 패해 식물 국가가 된 상황인데도 그 나라를 붙들며 조선의 국가 운명을 의탁하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바로 이어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 목도하게 된다. 이것은 위정자들이 무책임하게 국가 경영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와 관련해 1846년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이 귀국 1년 만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당시의 국제 정치적인 상황과 프랑스 국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영국군의 태도에 대한 설명을 했다. 특히 영국에 대해서는 포도청에서의 서른한 번째 진술에서, “영국 사람은 언제나 말하기를 ‘중국처럼 큰 나라도 우리에게 항거하지 못했는데, 조선 같은 작은 나라가 끝내 교를 금지할 수 있을 것인가? 장차 3~4척 배를 조선에 보내겠다.’ 하므로 제가 나가는 것이 불리하다는 말을 누차 이야기해 이해시켰습니다.” 하고 설명까지 했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쟁투의 목격을 현장에서 자세히 알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정치 상황이나 그 이후의 역사의 전개에 있어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중요한 기회였는데 조선 조정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관심도 갖지 않고 흘려버렸다. 역사에서 가정을 생각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만약 그 당시 조선 조정이 김대건의 말을 듣고 또 그를 살려 그의 해박한 국제 정치학적 지식을 잘 활용했다면 조선은 그 이후에 벌어진 역사의 선택에서 정확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그 바로 몇 십 년 후에 벌어질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의 굴욕을 겪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