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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문화 차이 극복의 파도-7

2016.11.14 11:45

윤태일 조회 수:563

아직도 15살 소년에 지나지 않았던 조선의 시골 소년들과 서양 선교사들의 공동생활은 그들의 생긴 모양만큼이나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 우리의 소년들은 처음부터 서로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선교사들과의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선교사들의 극진한 보살핌과 소년들의 자발적 순명에 의해 서로의 불편함은 극복해 나갔다. 그러나 그 생활 속에서 몇 가지 웃지못할 갈등도 그들이 남긴 편지 속에서 엿보인다.

그 하나의 예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의 설명에서 비롯되었다. 선교사들이 삼위일체 신비의 교리 설명에서 성삼위는 서로 위격에서는 다르지만 서로 위아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동일하다고 가르치니 유교적 바탕의 조선의 의식에 물들어 있는 소년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일이라 그 교리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따져서 삼위일체 교리의 설명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는데 여기에는 엄연히 아버지와 자식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삼위가 동격이라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선교사들의 편지는 적고 있다.

또 한 번은 소년들이 고해 시 어떤 것이든 소죄를 고하지 않는 사람은 통회가 없고 따라서 그러한 상태에서 사죄를 받으면 독성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선교사들에게 주장했다.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대죄만은 모두 고해야 하지만 소죄는 고할 엄격한 의무가 없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그들은 선교사가 그들을 우롱한다고 생각했다. 소년들이 선교사의 말을 믿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다고 선교사들은 고백한다. 이처럼 조선의 소년들은 비록 외국 선교사들의 손에 이끌려 공부하러 온 어린 소년들이었지만 원칙에 있어서는 자기들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기도 하는 당당한 소년들이기도 했다. 선교사들 또한 이 동양 소년들과의 생활이 마냥 편할 수만은 없었다.

 

이 선교사들 대부분이 본국인 프랑스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사제 서품 후 곧바로 환송 행사를 마치고 마차에 올라 선교지에 대한 노래를 부르며 브레스트(Brest) 항구에 도착해 배를 타고 이곳 임지로 오기 때문에 20대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선교지 조선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파리외방전교회 노래를 소개하면,

 

“오, 조선이여!

오, 나의 기쁨이여! 오, 나의 새로운 조국이여,

나는 너를 보고야 말며 너를 위해 내 삶을 바치리라. 큰 배가 흔들거리며 항구에서 나를 기다리도다. 안녕 프랑스여, 나는 너를 떠나노니, 순풍이여, 네 나래를 펴라.

나는 거기에서 더욱 아름다운 해변을 찾게 되리라. 그렇다. 나는 죽어도 살아도 조선인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성가집)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하느님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지역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제의 길이었지 신학생 교육을 위한 소임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교육을 위한 여건과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이라 모든 것을 하나하나 준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37년 10월 4일 마카오에서 파리 본부로 보낸 편지의 내용 중 교육 기자재 청구에 대한 내용을 보면 필요 물품이 잡지, 수준기, 기압계, 염색성의 잔, 산성의 유리병, 최고품 의 연필 3타스, 한자가 새겨진 기적의 메달, 속기계, 자명종 등 자세히 적혀 있다. 특히 자명종에 대해서는 신학생들과의 정확한 시간관념을 위해 필수품이라고 재차 강조한다. 또한 추가적으로 바늘, 성냥, 부싯깃등 자질구레한 것들도 보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들은 신학생들의 교사로서, 지도자로서, 아버지로서, 의사로서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자신속에서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년들이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신심, 겸손, 면학심, 선생에 대한 존경 등에서 완전하다고 평가하며 얼마 안가서 잘될 것으로 기대를 가지며 격려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신학생들과의 친화를 위해 조선말을 배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