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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 교회-4

2016.10.25 10:37

윤태일 조회 수:641

교황의 명에 의해 조선의 선교를 담당하게 된 파리외방전교회(Socie- 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는 주문모, 여항덕 등 중국 선교사 신부들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조선을 독립된 대목구(代牧區)로 설정 받았고,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ére, 1792~1835) 주교가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658년 7월 29일 창설되었고, 1831년 9월 한국에 처음 진출해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은 물론 교회를 통해 한국 민족과 고락을 같이한 선교 단체이다.

      

149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식민지의 경계선을 구분해 주었다. 이후 17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 세계를 통해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고, 아울러 종교적으로 로마 교황청과의 계약, 이른바 포교상의 ‘보호권’에 의해 복음 전파 활동에 있어서도 상당한 우위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교황청 의 포교 성성(布敎聖省)은 이러한 종교상의 우위권을 분쇄하기 위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열(布敎熱)을 이용해 1658년 선교 단체의 설립은 물론, 1659년 팔뤼(F. Pallu)와 모트(P. L. la Motte) 두 신부를 주교로 임명한 뒤 그들을 샴(오늘의 태국)으로 파견했다.

 

1664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곳에서 교구사제뿐만 아니라 선교 사제 희망자를 모든 교구로부터 모집해 성직자로 양성한 후 아시아로 파견했다. 이 신학교의 설립은 포교사(布敎史)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포교 지역에 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포교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즉 그들은 통역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각 지역에 회장(會長)을 임명해 포교 활동을 하고, 회장들 중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해 방인 성직자(邦人聖職者)를 양성하게 된다. 결국 파리외방전교회는 파견된 포교 지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현지인(現地人) 성직자를 양성해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한편 1825년 사제를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은 1827년 9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했고, 파리외방전교회 역시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회원이 10여 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했다. 그는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했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 대목구장인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가 입국했다. 그들은 곧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해서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품을 받을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