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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마닐라 피신

2017.10.13 14:50

윤태일 조회 수:1046

마닐라 피신


중국에서의 아편 수입과 판매 금지는 이미 181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근절되지 않자 청나라에서는 1832년 아편 금지 장정을 마련 했으며 1834년에는 아편 판매 금지령을 공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37년 임칙서가 호광 총독에 임명되었을 때 영국인이 아편 3 4천 상자를 청나라에 들여오면서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고 마침 내 임칙서는 1839년에 국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은 전쟁을 계획하게 되고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본부는 마카오에 주 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인 부대표 리부아(Napoleon Libois) 신부와 조선 신학생 교장 신부인 칼르리(Joseph M. Callery) 신부와 교육을 맡고 있는 데플레슈 신부와 조선인 신학생 및 코친차이나 신학생들을 안전한 마닐라로 피신시키게 된다. 마닐라 피신에 대해서는 피숑(Léon Pichon) 신부가 편집한 <김대건 신부 서한집>에 조선 신학생들이 마카오에 도달한 지 불과 2달 만인 1837 8월에 마닐라로 피신했다가 그해에 마카오로 되돌아왔다고 기록된 것이 유일하다. 또 지금까지는 이 기록을 토대로 1837년의 피신 사실을 그대로 믿어 왔다. 그러나 피숑 신부의 기록에는 피난의 이유도, 또 하등의 근거 자료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마카오 대표부 대표인 르그레주아(Pierre Louis Legregeois) 신부가 1837 8월부터 마닐라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또 거기서 마카오의 부대표 바랑탱(Andre N. A. Barrentin) 신부에게 포르투갈 당국에 의해 마카오에서 축출될 경우 칼르리 신부와 그의 조선 신학생들을 마닐라로 피신하게 하도록 지시 했던 것도 사실이다. 피숑 신부는 아마 그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해서 김대건 일행이 함께 마닐라로 피신했을 것으로 단정을 내린 것 같다. 그러나 르그레주아 신부는 축출되어 마닐라에 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건강 때문에 휴양차 가 있었다. 그는 1837년 말에 마카오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간 김대건 일행이 마닐라로 피신했다거나 또 그들과 함께 마카오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1837년 조선 신 학생들이 마닐라로 피신한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김대건 일행이 마카오에 체류할 당시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여서 유럽의 많은 국가와 가톨릭교회는 마카오에 아시아 본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확대를 위한 제국주의 정책이 격화되어 가면서 포르투갈 당국은 마카오에 주재하고 있던 각국 기관에 대해 기존에 제공하고 있던 편의를 줄여 갔고 급기야는 다른 지역으로 근거지 이전을 요구한다든지 체류 허가를 불허하는 등으로 인해 여기서 머물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도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더해 그 당시 광둥 지역에서 무역으로 거래되던 아편의 대량 유통으로 인해 청나라는 아편 거래를 불법화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등 민심은 흉흉하고 이것으로 인해 소요의 조짐마저 일어 마카오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은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었다. 이에 파리외방 전교회 극동 본부는 김대건을 비롯한 신학생 4명과 몇 명의 신부들을 마닐라로 피신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필리핀은 벌써 수세기 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로서 가톨릭을 받아들여 거의 모든 국민이 가톨릭을 믿 는 아시아의 가톨릭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피난한 사람은 칼르리 신부 와 데플레슈 신부를 비롯해 코친차이나 신학생 2명과 김대건 및 최양업 등 6명이었다. 이들을 실은 배는 1839 46일 토요일 마카오를 출발 해 4 7일 저녁때 닻을 올렸다. 이리하여 4 19일 아침 마닐라에 도착해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5 3일까지 14일간 머물렀다. 그들은 스 페인 선박을 이용했으며 운임으로 신부들은 각자 50피아스트라, 학생 들은 25피아스트라를 지불했다. (피아스트라는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 차이나 화폐로 25피아스트라는 현재 한화로 45만 원 정도 가치에 해당 한다.) 항해를 통해 칼르리 신부와 데플레슈 신부와 신학생 2명은 뱃멀미를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무사했다. 선장은 김대건 일행을 극진히 돌보 아 주었다. 승객들이 많아 방들이 다 찼으므로 선장은 자기 방과 부선장 인 자기 동생 방을 일행에게 양보하고 그들은 갑판, 심지어는 바닥이나 의자에서 잤다. 이들은 함장과 사관들, 전 승무원이 갑판에 모여 기도와 묵주기도 바치는 것을 보고 크게 감화를 받았다. 항해에서 피할 수 없는 사소한 불편들, 특히 이곳 해상에서의 지독한 더위를 제외하면 그들의 여행은 아주 좋은 편이었다.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 마닐라의 대주교는 사목 방문을 위해 부재중이었고 5 10일경에야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그들을 받아 주었는데 그들은 많 은 사랑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환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아 할 수 없었던 일들도 당가 신부(수도원 살림을 맡아 하는 신부)가 친절하게 직접 해 주었다. 또한 원장 신부는 필요한 일이 있으면 무엇이 든 청하라고 여러 번 재촉하기도 했다. 그들의 숙식에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준비되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총독과 총대리도 방문했다. 두 사람 다 아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총대리는 즉시 그들 모두에게 각자 50대의 미사 예물을 주는 호의까지 보여 주었다. 또한 그들이 방문한 아우구스티노회의 관구장도 그들을 친절히 맞이하고 그의 권한 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봉사를 해 주었다. 아울러 셰뇨(Chaigneau) 신부 는 김대건 일행이 원한다면 편지를 그들의 편지와 함께 부쳐 전달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제안을 고맙게 수용했다. 투아네트(Toinette) 신부도 자주 만났는데 친절히 대해 주었다. 칼르리 신부도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친절한 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리부아 신부는 스페인 말을 못해 그렇게 많은 방문은 못했다. 또한 필리핀에서는 비판과 비방과 중상이 심해 되도록이면 외출을 삼가고 필요한 방문 만 하고 있다고 선교사들의 편지는 쓰고 있다. 기후와 음식의 변화에서 오는 불편함은 그 당시 통킹과 코친차이나에서 생활하는 동료 신부들 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학생으로는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코친차이나 출신 2명 등 4명이었다. 본래 베트남 신학생이 3명이었으나 그 중 한 명은 르그레주아 신부의 지시에 따라 싱가포르로 보냈다. 그곳 도미니코회 수도원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은 칼르리 신부는 마닐라에서 배편으로 3일이 걸리는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러 5 2일 그곳으로 떠났다. 가브리엘 신부는 선교사 일행을 후대 해 준 신부다. 칼르리 신부는 지질학과 광물학의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김대건 일행도 좀 더 나은 학업 환경을 위해 4 19일 마닐라에 도착해 거기서 며칠을 보낸 장소를 떠나 5 3일 금요일 롤롬보이의 도미니코 수도원 농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실제로 정오경 에 출발해 7시간의 항해 끝에 (저녁 7시경) 롤롬보이 도미니코 농장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