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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성인과 한국천주교순교사

마카오로의 필사의 대장정-5

2016.10.27 16:19

윤태일 조회 수:629

한양 출발

 

1836년 12월 2일 김대건 일행은 출발에 앞서 성경에 손을 얹고 모방 신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래와 같은 서약을 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나와 조선 선교지의 후계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약속합니까?”

“약속합니다.”

“나와 조선 선교지의 나의 후계자들인 장상들에게, 장상에게 신청하여 허락받지 않고서는 다른 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또는 장상이 지적한 장소 외에 다른 장소로 가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까?”

“약속합니다.”

이렇게 서약을 마쳤지만 사실 김대건은 본래 동행하는 걸로 되어있지 않았다. 모방 신부를 찾아온 것이 두 학생보다 늦어 기초적인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 결정 순간 모방 신부는 이러한 신학생 파견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걱정이 되어 마지막 순간 김대건도 합류시키기로 결정했다. 돌이켜 보면 이 결정은 조선 교회를 위해서는 너무나 다행한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신학생 중 한 명인 최방제가 마카오에 도착한 후 몇 개월 되지 않아 위열병(胃熱病)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만약 김대건 없이 최양업 혼자 남은 상황이었다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3년 후에 모방 신부도 기해박해에 순교했기 때문에 김대건은 마카오로 유학을 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고 이렇게 되면 그 후 김대건이 프랑스 선교사를 국내에 인도하는 모든 일이 없었을 것이고 조선 교회는 아무런 진전 없이 낙후되었을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서약을 마치고 출발을 준비 중인 상황에서 하나의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마침 그 시간에 한양에서 반역자를 추적하기 시작한 사건이 발생해 출발에 차질이 생겨서 모방 신부는 간신히 설득을 해서 출발은 시켰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재정적 상황이 여의치 못해 변문까지 가는 여비밖에 주지 못했다. 이날 출발한 일행은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과 중국인 여항덕 신부와 조선인 봉사자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을 포함해 모두 9~10명이었다.

 

한편 조선 입국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인 샤스탕은 조선 신학생들보다 3일 전인 12월 25일 벌써 책문에 도착해 있었으며, 조선에서 온 김대건 일행과 만나 중국인 안내인 2명에게 조선 신학생 3명을 마카오로 인도해 주도록 부탁하고 3일 후인 12월 31일 조선을 향해 출발해서 1837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했다.

 

한편 김대건 일행은 의주에서 샤스탕 신부를 만난 후 거기까지 샤스탕 신부를 인도해 왔던 중국 측 안내인 2명에게 맡겨져 머나먼 마카오 여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소년들의 모습은 살을 에는 듯한 만주 벌판의 날씨와 어울려 더욱 눈물겹게 느껴졌다. 바깥에 나가 있기만 해도 힘든 눈보라 속 만주 벌판을 끝없이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이 행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순례의 길이었다. 15살 소년 세 명이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중국인 안내인의 손에 이끌려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었다. 마땅한 잠잘 곳이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음식이 입에 맞을 리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어느덧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변하고 있었다. 한양을 출발한 김대건 일행은 12월 28일 의주를 거쳐 요동의 심양과 북경을 지나고 제남을 향하고 있었다. 겨우내 혹독한 기후 속에 강행군 한 소년들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한양에서 의주, 거기서 북경을 거치고 제남과 남경을 지나고 항주를 거쳐 마카오에 이르는 길은 족히 5,0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이다. 7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걷는다 해도 매일 5~6시간을 걸어야 하는 거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페인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야고보 사도가 스페인 선교를 위해 걸었다는 길이다. 현대의 안락한 장비와 신발을 신고도 이 순례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게 요즈음 보통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서 김대건 일행이 걷고 있는 이 길은 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의 적어도 10배는 되는 거리와 시간이다. 추운 날씨에 혹한의 지역을 지나고 그 후 봄이 와서 따뜻한 지역에서는 더운 시기에 그 지역을 통과하는 강행군이라 기력은 더욱 심하게 탈진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 안내인들은 안내를 전문으로 하고 체력적인 면에서 소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을 테니 그런 전문적인 안내인을 따라 보조를 맞추며 강행군한 것은 가히 살인적인 고난의 행군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이 안내인들은 이 소년들을 데려다 준 후 바로 페레올 주교를 안내할 계획이 있었던바 행군을 서둘렀을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체력이 고갈되고 기후는 몸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방향이었고 끊임없는 이동에 불규칙한 식사와 잠자리는 세 소년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무사히 마카오까지 도착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 행군을 통해 소년들의 정신은 강철과 같이 단단해졌을 것이다. 이제 이들은 산골의 순박한 소년들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 천지를 두 발로 직접 누빈 최초의 조선 청년으로 변해있었다. 그들은 이제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의 가슴속은 오직 하느님을 그리며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로 부풀게 되었다.

그들이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1827년 6월 7일이었다. 무려 187일간의 대장정이었다. 그들은 모방 신부가 보낸 여러 종류의 편지들을 전했다. 이들을 맞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지부 신부들도 너무나 감격스러워했으며 이 소년들이 놀랄 만큼 순박해 보인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